맨리에서 스핏 브리지까지 걷다

시드니는 이제 서서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고 있다.

아침은 아직 8도의 쌀쌀함을 머금고 있지만, 한낮의 햇살은 어느새 겨울이라 하기엔 따갑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오늘은 Manly에서 Spit Bridge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을 걸어본다.

Spit Bridge 주변은 전에 한 번 걸어본 적이 있지만, Manly에서 Spit Bridge까지 이어지는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의 길이 조금은 기대됐다.

아침 일찍 기차에 올랐는데 평소보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며칠째 이어지던 비와 흐린 날씨가 걷히고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 드러나자, 사람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원래는 Wynyard Station에서 버스를 타고 Spit Bridge로 이동해 걷기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필 오늘, 시드니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었다.

 도로 곳곳이 통제되면서 버스 운행도 영향을 받아 Spit Bridge로 바로 갈 수 없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뜻밖에도 그 덕분에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을 만나게 됐다.

거리에는 마라톤 참가자들과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시민들은 푯말을 들고 춤을 추며 박수를 보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나도 그들의 열기에 스며들고 있었다.

계획은 어긋났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뜻밖의 풍경 덕분에 오히려 즐거운 워킹의 시작이 되었다.

이제 방향을 바꾼다.
Circular Quay에서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 Manly로 향한다

Manly Wharf

Manly Wharf에 도착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워킹을 하러 이곳을 지나곤 한다.
자주 찾는 곳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올 때마다 풍경의 느낌이 다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여름이면 서핑과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오늘처럼 시드니 마라톤이 열리는 날에는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같은 장소인데도 만나는 사람과 날씨,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에 따라
항구는 늘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항구도 한층 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바다를 하늘에 비춰놓은 것인지,
아니면 하늘을 통째로 뒤집어 바다 위에 엎어놓은 것인지 모를 만큼,
바다와 하늘이 한없이 푸르렀다.

왜 오늘따라 이 맑은 하늘이 마음 깊이 스며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 하나만은 하늘을 닮아, 오래도록 푸르렀다.

Forty Baskets Beach

Manly를 벗어나  Forty Baskets Beach에 도착했다. 

해변에는 모래 위에 몸을 누인 채, 오랜만에 찾아온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반려견과 함께 모래사장을 달리고, 파도 곁을 오가며 웃음을 나누는 사람들도 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오후였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 그리고 곁에 있는 작은 행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오후였다.

문득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햇살 아래 아무 걱정 없이 누워 있는 것,
반려견과 함께 모래사장을 달리는 것.
어쩌면 행복은 바로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특별할 것 없는 오후의 한 장면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처럼 느껴졌다.

부러웠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평범하고 따뜻한 날이 찾아오겠지.

Reef Beach

Reef Beach는 주변의 다른 해변들처럼 눈에 띄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고 소박한 해변에 가까웠고, 사람들의 발길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편안했다.
화려하지 않아서 좋았고, 조용해서 잠시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Dobroyd Head

Dobroyd Head로 올라가는 길에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크게 힘든 길은 아니었지만, 나무 그늘이 많지 않아 따스하다기보다는 햇볕이 제법 따갑게 느껴졌다.

대신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시야가 탁 트이면서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금 전의 오르막길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Grotto Point

Grotto Point에서는 Aboriginal rock engravings도 만날 수 있었다.
규모가 크거나 화려한 유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천 년 전, 이 땅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바위에 남겨놓은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소박한 문양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이 바위 위에 남아 있었다. 

Clontarf Beach를 지나 다시 길 위로

Clontarf Beach를 지나면서 풍경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걷는 길에서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캥거루과의 작은 동물, 왈라비였다. 걷다 만난 뜻밖의 왈라비 한 마리가, 이날의 워킹에 작은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이후의 길은 조금 더 힘이 들었다.

Grotto Point Lighthouse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르막과 계단이 계속 이어졌고, 길도 제법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입구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아 몇 번이나 주변을 살펴야 했다.

나보다 앞서 등대를 찾아가던 젊은 호주 커플은 길을 살펴보더니, “더 이상 들어갈 길이 없는 것 같다”며 발길을 돌렸다.

나 역시 잠시 고민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쉬웠다. 결국 조금 더 길을 찾아 들어가 보기로 했다.

수풀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한참을 더 들어가자, 마침내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예전에는 등대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길이 많이 유실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탓인지, 자연이 다시 그 길을 조금씩 덮어버린 듯했다.

Fisher Bay에서 Spit Bridge까지

마지막 구간인 Fisher Bay에서 Spit Bridge로 향하는 길은 앞쪽의 Manly 구간에 비하면 조금 단조롭게 느껴졌다.

걷는 동안 왼쪽으로 비슷한 모습의 해변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운 모래사장도 있었지만, 어떤 곳은 모래 대신 바위와 바닷물이 맞닿아 있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기대하고 걷는 길이라면, 마지막 구간은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돌아보면, 계획대로 흘러간 순간은 많지 않았다.

버스가 운행되지 않아 페리를 탔고, 예상하지 못했던 마라톤 응원 장면을 만났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Manly에서 걷기 시작해 작은 해변을 지나고, 바위에 새겨진 오래된 흔적을 만났다. 뜻밖에 왈라비를 만나기도 했고, 쉽게 찾을 수 없었던 등대를 찾아 한참을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금 단조로운 길을 걸어 마침내 Spit Bridge에 도착했다.

돌이켜보면, 계획에서 조금 벗어났던 순간들이 오히려 오늘의 워킹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지금 계절이 바뀌는 길목을 걷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나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모를 나 사이에 놓인 시간도 함께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절이 자연스럽게 다음 계절로 넘어가듯, 나 역시 모르는 사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responses to “맨리에서 스핏 브리지까지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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